― '법체계의 폐쇄성' 문제와 규칙 인정기준(rule of recognition)
I. 서론
현대 법철학에서 H.L.A. 하트(Herbert Lionel Adolphus Hart)의 규칙이론은 실증주의 법이론의 핵심 축을 형성한다. 그는 법을 단지 외적 강제나 도덕적 명령으로 환원하는 전통적 관점을 비판하고, 법을 ‘사회적 규칙의 체계’로 파악하는 혁신적 이론을 제시하였다.
하트는 법체계를 설명하면서 1차적 규칙과 2차적 규칙의 이중 구조를 제시하고, 이를 통해 법의 구조적 정합성과 제도적 작동 방식을 설명하였다. 특히 ‘규칙인정의 규칙’은 법체계의 존재 기준이자 폐쇄성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되었다.
이 글은 하트의 규칙이론을 구조적으로 고찰하고, 법체계의 폐쇄성과 규칙 인정 기준을 중심으로 이 이론의 핵심적 논점을 설명한다.
II. 법을 규칙으로 본다는 것: 하트의 문제의식
1. 배경: 오스틴 비판
하트는 선행하는 존 오스틴의 명령이론을 비판한다. 오스틴은 법을 주권자의 명령으로 보았으며, 이는 물리적 강제와 복종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적 모델이었다.
- 비판점:
- 법은 명령 아닌 허가, 권한 부여 등도 포함
- 법의 지속성과 체계성을 설명하지 못함
- 헌법, 사법제도 등 권위 자체의 근거를 설명할 수 없음
2. 하트의 대안: 규칙 중심 이론
하트는 법을 ‘사회적 실천’ 속에서 형성되는 규범적 규칙들의 집합으로 보며, 법의 존재는 물리적 강제보다 사회적 수용과 규범 인식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III. 1차적 규칙과 2차적 규칙의 구별
하트 이론의 핵심은 법을 두 가지 규칙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한다.
1. 1차적 규칙
-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직접적 규범
-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규정
- 형법, 민법, 행정법의 행위 규율 조항이 이에 해당
예: "타인의 재산을 훔치지 말라", "납세의 의무가 있다"
2. 2차적 규칙
- 1차적 규칙의 형성·변경·적용·해석에 관한 규칙
- 법체계의 구조적 기반을 구성함
하트는 2차적 규칙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구분 설명 예시
규칙 인정의 규칙 | 무엇이 법인지 판별하는 기준 | 헌법 제정절차, 입법절차 등 |
규칙 변경의 규칙 | 법의 생성과 개정 절차 | 입법권, 조례 제정권 등 |
규칙 적용의 규칙 | 분쟁 해결 및 법 집행 방법 | 법원의 관할, 재판절차 등 |
IV. 규칙인정의 규칙
1. 개념
규칙인정의 규칙은 특정한 기준을 만족하는 규범만이 유효한 법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내적 기준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법체계가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최고의 규칙’이다.
- 이는 명문화되어 있지 않을 수 있음 (ex. 영국의 관습헌법)
- 법적 실천 공동체가 사실상 수용하고 있는 규칙
예: 대한민국의 경우, 헌법 제1조~제130조는 실질적인 rule of recognition의 핵심적 근거
2. 기능
- 법체계의 존재 조건 제공
- 법과 비법의 구분 기준
- 하급규범의 정당성 평가 기준
- 법의 폐쇄성/자기준거성 확보
V. 법체계의 폐쇄성과 규칙이론
1. 법체계의 폐쇄성이란?
법은 내부의 절차와 기준에 따라 스스로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체계이다. 하트의 규칙이론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폐쇄성을 설명한다.
- 규칙 인정의 기준은 외부 도덕이나 정치가 아니라 내부 실천과 승인에 기반
- 법관은 규칙인정의 규칙에 따라 법의 존재를 판별하며, 자의적 판단을 최소화
- 법체계는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법을 생성·변경·해석
2. 개방성과 경계 사례
그러나 하트는 경계사례가 발생할 때는 법관이 해석과 재량을 통해 법을 보완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이 점에서 하트는 완전한 폐쇄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규칙이 모호할 때는 법의 개방성과 창조성이 작동한다고 본다.
VI. 하트 규칙이론의 평가와 현대적 함의
1. 공헌
- 법을 사회적 실천의 체계로 해석함으로써, 법의 제도적 정당성 설명
-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을 넘어, 제도적 규칙구조로서의 법 이해 가능
- 규칙인정의 규칙을 통해 법의 합법성 정당화 구조를 제공
2. 한계 및 비판
- 도덕적 판단의 배제: 법의 정당성에 대한 도덕적 기준 부족
- → 론 드워킨은 “법은 규칙이 아닌 원칙도 포함”된다고 비판
- 권력과 이념 문제 간과: 규칙의 수용은 실질적으로는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될 수 있음 (비판법학 시각)
VII. 결론
하트의 규칙이론은 법을 단지 명령이나 도덕으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수용된 규칙 체계로 파악함으로써 현대 실증주의 법철학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1차적 규칙과 2차적 규칙의 구별은 법의 구조적 이해를 가능케 하며, 규칙인정의 규칙은 법체계가 자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법의 경계에 있는 사안에서는 여전히 해석과 재량, 정치적 판단이 개입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법은 완전한 폐쇄체계가 아니라, 제도화된 개방성을 지닌 실천 영역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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