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기판력의 개념
기판력이란, 일단 확정된 판결이 이후의 다른 소송절차에서 그 판단 내용을 다시 다툴 수 없도록 하는 법적 효력을 말한다. 이는 소송경제와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고, 중복 소송의 금지 및 확정 판결 존중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이다.
민사소송법 제216조는 기판력의 효력을 “동일한 사건에 관하여 다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여, 판결이 확정되면 당사자 간에는 더 이상 동일한 청구를 다툴 수 없도록 한다.
기판력은 확정 판결의 ‘내용’에 대한 구속력으로서, 형식적 확정력과는 구별된다. 형식적 확정력이 단순히 소송이 종료된다는 절차적 효력이라면, 기판력은 실질적으로 확정된 판단이 후속 소송에 미치는 실체법적 효력이다.
II. 기판력의 요건
기판력이 발생하려면 아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 종국판결이어야 함: 기판력은 소송을 종료시키는 종국판결, 특히 본안판결에만 발생한다. 가령 소 취하나 각하 판결에는 기판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 확정되어야 함: 판결은 항소나 상고의 가능성이 소멸함으로써 확정되어야 하며, 확정 전에는 기판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 적법한 재판관할과 절차에 따른 판결이어야 함: 민사소송법상 재판권이 없는 경우의 판결은 원칙적으로 기판력이 없다.
III. 기판력의 객관적 범위
기판력의 객관적 범위란, 확정판결의 판단 대상인 법률관계 중 어느 범위까지 후소에서 다툼이 배제되는지를 의미한다. 이는 확정판결의 판단 대상 사실(쟁점)과 청구의 내용에 따라 결정된다.
1. 주된 판단사항만이 포함
기판력은 확정판결의 주문에 포함된 판단사항에만 미친다. 즉, 판결문 중 판시사항 전부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청구에 관한 판단 중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하게 판단한 사항에만 효력이 생긴다.
예컨대, 소유권에 기하여 반환청구가 인용된 경우에는, 그 소유권 인정 판단은 기판력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단순한 부수적 판단, 예비적 판단, 또는 가정적 판단 등은 기판력을 가지지 않는다.
2. 법률적 판단에 대한 제한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은 기판력의 대상으로 인정되지만, 법률적 평가는 일반적으로 기판력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는 법률의 해석은 본질적으로 법원의 재량과 변화 가능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한 법령 해석이나 규범적 평가에 해당하는 판단은 후속 소송에서 다시 다툴 수 있다.
3. 판례의 태도
대법원은 “기판력은 당해 판결의 **주문을 전제로 한 이유 중의 판단으로서 당해 분쟁의 해결에 필수적인 판단에 미친다”고 보며, 부수적 판단에는 미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다.
▶ 대법원 2004다22063 판결
IV. 기판력의 주관적 범위
기판력의 주관적 범위란, 확정판결의 효력이 어떤 당사자에게까지 미치는지를 의미한다. 즉, 확정판결의 기속력이 누구에게 적용되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1. 당사자주의 원칙
민사소송법은 당사자주의를 기본 원칙으로 삼아, 기판력은 판결의 당사자 및 그 승계인에게만 미친다. 제 제3자는 해당 판결의 당사자가 아니므로, 그 판결로부터 기판력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민사소송법 제218조 제1항은 “기판력은 당사자 간에만 효력이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당사자가 아닌 제3자는 동일한 법률관계에 대해 후소에서 다시 다툴 수 있다.
2. 승계인에 대한 효력
기판력은 당사자의 승계인에게도 미친다. 이는 소송 계속 중 그 권리를 양수하거나, 판결 확정 후 해당 권리를 승계한 자가 모두 포함된다. 이때 ‘승계인’이란 법률상 동일한 권리관계의 주체로서 지위를 이어받은 자를 말한다.
예) A가 B에게 대여금 반환 청구를 하고 승소하여 확정된 후, A가 사망하여 C가 상속한 경우, B가 다시 다투는 소송에서는 기판력이 작용하여 소송이 배제된다.
3. 공동소송인
공동소송에서의 기판력은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개별적으로만 발생한다. 즉, 공동소송인 중 한 사람에 대한 판결이 다른 공동소송인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수적 공동소송(예: 공동소유자 전원의 소송)에서는 기판력이 공동으로 발생한다. 민사소송법 제218조 제2항은 이에 대해 “소송의 성질상 판결이 다른 공동소송인에게도 효력을 미쳐야 할 경우에는, 기판력이 그들에게도 미친다”고 규정한다.
예) 공유물 분할 청구의 경우 공유자 전원이 공동당사자이므로, 그 중 한 명에 대한 판결은 전원에게 기판력을 가진다.
V. 기판력의 효력
기판력의 효력은 주로 소송물의 동일성에 따라 후소의 제기 제한, 또는 판단의 기속력으로 나타난다. 민사소송법상 세 가지 효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소송물 판단에 대한 구속력 (후소에서의 항변 가능)
기판력의 본질적 효력은 동일한 소송물에 대해 후소가 제기된 경우, 상대방이 이를 항변함으로써 소를 각하 또는 기각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이전에 소유권확인청구에서 승소한 A가 다시 동일한 대상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면, 피고는 기판력을 근거로 항변할 수 있다.
2. 법원의 심판권 제한
기판력은 단지 당사자만이 아니라 법원에게도 미친다. 법원은 확정된 판결 내용에 반하는 판단을 할 수 없으며, 기판력에 저촉되는 청구를 허용할 수 없다. 이를 재심사 금지원칙 또는 중복심리금지라고도 한다.
3. 사실인정 및 증거재현 금지
이미 판단된 사실에 대해 후소에서 다시 증거조사를 요구하거나 다투는 것은 금지된다. 이는 절차의 반복을 막고 소송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기능한다.
예) 확정판결에서 ‘임대차 계약이 존재한다’는 점이 인정되었다면, 후소에서 동일한 계약의 존재 여부를 다시 다툴 수 없다.
VI. 기판력과 다른 효력의 비교
기판력은 확정 판결의 여러 효력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다음과 같이 다른 효력과 비교된다.
형식적 확정력 | 판결이 더 이상 다툴 수 없게 됨 | 절차적 종료 | 불복기간 경과 |
기판력 | 후소에서 판단 배제 | 실체법적 구속 | 판결 확정 시 |
집행력 | 강제집행 가능 | 집행기관과 당사자 | 집행문 부여 시 |
특히, 기판력은 실체법적 효력으로서 후속 소송에서 판단을 배제하는 역할을 하며, 형식적 확정력이나 집행력과는 기능과 적용 범위가 다르다.
VII. 기판력의 제한과 예외
기판력에도 일정한 예외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기판력이 배제되거나 제한된다.
- 재심사유 존재 시
민사소송법 제451조는 확정판결에 중대한 하자가 있을 경우 재심을 허용하며, 이 경우 기판력은 재심 판결로 뒤집을 수 있다. - 사정변경
후소에서 사실관계나 법적 상황이 본질적으로 변경되었을 경우(예: 채무불이행이후 사후변제), 기판력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본다. - 선결적 판단의 구속력 부정
선결문제에 대해 판단된 사항은, 후소의 청구 자체가 그 선결문제에 해당하지 않는 이상 기판력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예) 이혼소송 중 재산분할에 대한 판단이 있었더라도, 이후 별도로 제기된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에는 기판력이 미치지 않는다.
VIII. 결론
기판력은 민사소송 절차에서 확정판결의 실질적 효력으로서, 후속 소송에서 동일한 사건을 반복하는 것을 방지하고 소송경제 및 법적 안정성을 실현하는 제도이다. 객관적 범위에서는 확정된 판단의 실질적 내용만을 대상으로 하며, 주관적 범위에서는 당사자 및 승계인에게만 효력이 미친다.
기판력은 단순한 절차종료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후속 소송을 제약하고 법원의 판단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재판의 일관성과 신뢰성을 유지한다. 다만, 그 적용에는 요건과 한계가 엄격히 요구되며, 재심과 사정변경 등 예외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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