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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

법의 개념: 규범인가 사실인가?

by 모지랭이 2025.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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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개념: 규범인가 사실인가?
법의 개념: 규범인가 사실인가?

― 규범적 법개념(한스 켈젠)과 사실적 법개념(에렌스트 에렌즈바이크)의 비교


I. 서론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법철학의 중심적인 과제였다. 특히 근대 이후 법을 하나의 '사회제도'로 보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법의 본질을 규범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사실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는 법이론의 분기점을 형성해왔다.

한스 켈젠(Hans Kelsen)은 20세기 대표적 규범주의 법학자로서 법을 '존재'가 아니라 '당위'로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대해 에렌스트 에렌즈바이크(Ernst Ehrlich)는 법의 실질은 살아있는 사회관계 속에 있다고 보고, 법은 인간 상호작용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사실이라고 보았다.

본 글은 켈젠의 규범적 법개념과 에렌즈바이크의 사실적 법개념을 중심으로, 법의 본질에 대한 두 이론의 구조와 차이, 이론적 의의 및 비판점을 비교·분석한다.


II. 규범적 법개념: 한스 켈젠의 순수법학

1. 켈젠의 법학적 배경과 이론의 출발점

한스 켈젠(1881~1973)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법학자로, 《순수법학(Pure Theory of Law)》을 통해 법학을 정치적·사회학적 요소로부터 독립된 ‘순수한 규범과학’으로 수립하고자 했다. 그의 목적은 ‘법’의 본질을 규범 그 자체로서 파악함으로써 법학의 과학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2. 규범적 법개념의 핵심 구조

켈젠은 법을 하나의 규범체계, 즉 당위 명제로 구성된 체계로 보았다. 법은 "A라는 사실이 발생하면 B라는 법적 효과가 발생해야 한다"는 형식의 조건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법이 현실의 사실이나 도덕적 가치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당위의 체계’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예: “도둑질을 하면 벌금형에 처한다”는 법규범은 실제 도둑질의 행위 여부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규범이다.

3. 기본규범의 개념

켈젠은 규범체계의 최상위에 법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기본규범을 설정한다. 이 기본규범은 실증적 존재는 아니며, 법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가상의 전제로 기능한다.

예: "헌법은 따라야 한다"는 명제가 기본규범으로 작동

4. 규범적 법개념의 특징

항목 내용

법의 본질 당위(norm)
법학의 성격 가치중립적 과학
규범의 근원 기본규범으로부터 파생
법과 도덕 명확히 분리됨 (법실증주의)
사회적 사실과의 관계 독립적, 사실에 종속되지 않음

III. 사실적 법개념: 에렌스트 에렌즈바이크의 ‘살아있는 법’

1. 에렌즈바이크의 문제의식과 학문적 배경

에렌스트 에렌즈바이크(1862~1922)는 오스트리아의 법사회학자로서, 법을 법전 속 규정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규범’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에서 출발했다. 그는 법전 속 법과 현실 사회 속 법 사이의 괴리에 주목하며, 후자를 살아있는 법(Living Law)이라 명명하였다.

2. 살아있는 법의 개념

에렌즈바이크에 따르면, 실제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법은 단지 법률에 명시된 것이 아니라, 관습, 조직 내 규범, 인간 상호작용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실천규범이 중심이 된다. 즉, 법은 인간의 관계 속에서 사실로서 존재한다.

예: 전통시장 내 상인들 사이의 거래 관행, 마을 자치 규약 등은 비록 법전에는 없더라도 실제로 강력하게 작동하는 법이다.

3. 법과 사회의 불가분 관계

에렌즈바이크는 법을 이해하려면 법관의 판결이나 법률 조문보다도 사회적 행위자들의 실천과 그 관계망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법은 본질적으로 사회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4. 사실적 법개념의 특징

항목 내용

법의 본질 사회적 사실
법학의 성격 실천적·사회과학적
규범의 근원 인간관계, 사회적 실천
법과 도덕 실제로 중첩되며 구분 곤란
법전과의 관계 형식적 법은 일부일 뿐, 실질적 법은 더 광범위

IV. 두 법개념의 비교 분석

1. 접근 방식의 차이

항목 켈젠 에렌즈바이크

방법론 형식주의·논리주의 경험주의·사회학적 접근
법의 형식 당위명제(규범) 사회현실로서의 사실
학문 목적 법의 과학화, 정치 중립성 확보 법의 사회적 실효성 파악
중심 개념 기본규범, 규범체계 살아있는 법, 사회규범

2. 법과 현실의 관계

  • 켈젠은 법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현실에서 법이 지켜지지 않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법이다.
  • 반면 에렌즈바이크는 법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사실상 의미가 없으며, 사회가 지배적으로 받아들이는 규범만이 ‘살아있는 법’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본다.

3. 비판과 보완

관점 켈젠 비판 에렌즈바이크 비판

이론적 법을 현실과 분리함으로써 ‘공허한 체계’가 될 위험 법의 일반성과 예측가능성을 해침
실천적 실제 분쟁 해결에 도움이 되기 어려움 법치주의 원칙에 위협이 될 수 있음
현대적 시사점 데이터 기반 행정 등에서 규범 논리가 필요 법사회학, 갈등해결 연구에 유용

V. 현대적 함의와 결론

1. 규범 vs 사실 이분법의 재조명

켈젠과 에렌즈바이크는 각각 극단적인 법 개념의 양극단을 대표한다. 그러나 현대의 법 현실에서는 이 둘을 절충하거나 상호보완하는 방식이 주류적이다.

예를 들어, 판례법은 규범적 체계 안에서 형식적으로 구성되지만, 동시에 사회 현실과 여론, 실질적 효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한 행정법과 헌법 해석에서도 ‘사회적 실효성’과 ‘기본권 보장’이라는 사실적 요소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법철학적 메시지

  • 켈젠의 이론은 법을 ‘과학화’하려는 노력으로서 법해석의 자의성을 제한하는 데 기여했다.
  • 에렌즈바이크는 법이 실제 삶에 뿌리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실천적 함의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법은 규범이면서 사실이고, 사실이면서도 규범화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현대의 법이론은 더 이상 ‘법은 규범이다’ 또는 ‘법은 사실이다’라는 단편적 진술에 머무를 수 없으며, 현실과 규범 사이의 긴장과 조화를 다루는 통합적 법개념이 요구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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